광장의 불빛보다 먼저 읽어야 할 것
한국의 민주주의를 소개하는 사진에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거리를 메운 학생, 촛불을 든 가족, 응원봉을 흔드는 시민이다. 사진만 보면 큰 군중이 모여 대통령을 바꾸었다는 이야기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을 그곳에 모이게 한 일은 서로 달랐다. 투표가 조작됐고, 조사받던 학생이 죽었고, 그 죽음을 국가기관이 감추려 했으며, 대통령이 군을 국회에 보냈다. 사람들이 무엇에 항의했는지부터 읽어야 집회의 모습도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의 장소를 지도에서 읽었다면, 이번에는 거리와 공공기관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따라가 보자. 이 글은 1960년 4월혁명, 1980년 광주, 1987년 6월항쟁, 2016~2017년 촛불집회와 탄핵, 2024년 계엄과 그 뒤의 사건을 따라간다. 서로 다른 세대가 같은 일을 반복한 역사는 아니다. 선거를 지키려던 항의가 정권 퇴진 요구로 바뀌고, 학교에서 시작한 분노가 일터와 도시로 번졌으며, 거리의 요구가 국회 표결과 법원 판단으로 이어졌다. 그 사이에는 희생과 실패, 다시 마련해야 했던 절차가 있었다.
1960년: 투표함의 조작에서 마산의 거리로
1960년 3월 15일은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는 선거일이었다. 이승만과 집권 자유당은 권력을 이어가려 했다. 당시의 부정선거는 개표 숫자만 바꾸는 방식에 머물지 않았다. 국가기록원이 소개하는 비밀지령에는 미리 투표용지를 채워 넣는 방식, 여러 명이 조를 이루어 기표를 확인받는 공개투표, 야당 참관인을 쫓아내는 방식이 등장한다. 누구를 찍었는지 다른 사람이 확인한다면 투표용지를 받아도 자유롭게 선택하기 어렵다. 참관인이 없는 투표함은 그 선택이 제대로 세어졌는지 확인할 통로도 잃는다.
마산에서는 선거 당일 부정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경찰의 진압으로 사상자가 생겼다. 그때 실종된 김주열의 시신이 4월 11일 바다에서 발견됐다. 그의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는 사실은 학생과 시민들에게 전해졌다. 부정선거를 다시 하라는 요구 옆에, 사람이 왜 죽었으며 경찰은 무엇을 했는지 책임을 묻는 요구가 놓였다. 한 학생의 실종이 다시 거리의 사건이 된 것이다.
마산에서 시작한 분노는 서울의 대학가와 다른 도시로 이어졌다.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다가 정치 폭력배들에게 습격당했다. 집회를 끝낸 뒤에도 안전하게 귀가할 수 없었다는 사건은 다음 날의 항의를 키웠다. 선거를 비판하는 시민에게 다시 폭력이 가해지면서, 문제는 특정 투표소의 부정을 넘어 정권이 비판자를 어떻게 대하는가로 커졌다.
4월 19일의 발포, 그리고 26일의 하야
4월 19일 서울에서는 대학생과 중·고등학생,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경무대, 당시 대통령 관저 앞까지 향한 시위에 경찰이 발포했다. 다른 도시에서도 시위와 발포가 이어졌다. 이승만 정부는 계엄을 선포했지만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친 사건에 대한 책임 요구는 멈추지 않았다. 권력을 유지하려던 선거가 권력의 정당성을 무너뜨리는 일이 된 셈이다.
4월 25일에는 대학 교수들도 거리로 나섰다. 교수 258명이 시국선언에 서명했고, 부정선거 책임과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행진에 학생과 시민들이 합류했다. 발포 이후에도 정권은 일부 인물의 퇴진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항의는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데까지 이어졌다. 다음 날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선거의 공정성을 요구하던 항의가 독재 정권의 퇴진으로 이어진 것이다. 하야라는 결과를 기억하는 것과,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발포와 체포를 겪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은 함께 가야 한다.
그 뒤에 만들어진 정치적 기회가 오래 유지된 것은 아니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제2공화국이 무너졌다. 4월의 성공은 다음 해의 군사적 권력 장악을 막지 못했다. 시민이 정권을 물러나게 할 수 있다는 경험과, 새 질서를 안정적으로 지키는 일의 어려움이 동시에 남았다. 이후의 민주화운동이 4월혁명을 계속 불러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번 얻은 권리가 자동으로 보존되는 것은 아니었다.
1980년 광주: 학교 앞의 충돌이 도시 전체의 사건이 되다
1980년 봄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이어졌지만 5월 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전남대 앞에서는 다음 날인 18일 학생들과 공수부대가 충돌했다. 학생들은 학교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 항의했고, 군의 폭력적인 진압은 학교 앞에만 머물지 않았다. 거리에서 시민들이 구타와 연행을 목격하면서 더 많은 사람이 항의에 참여했다.
20일에는 택시와 버스 등 차량을 앞세운 시위도 벌어졌다. 학생의 시위를 멀리서 지켜보던 도시가 아니라, 일하며 그 거리를 오가던 사람들도 참여하는 항쟁으로 커졌다. 금남로와 전남도청 앞은 시민들이 모이는 중심 공간이 됐다. 21일 도청 앞 집단발포가 일어났고 시민들이 무장하기에 이르렀다. 무장한 시민군의 사진만 떼어 보면, 그 전에 계엄군의 폭력과 발포로 사람들이 죽고 다친 과정이 빠진다.
계엄군이 도심에서 물러난 뒤 도청에는 시민과 학생의 수습 조직이 만들어졌다. 부상자를 돌보고 식량을 나누고, 연행자 석방과 사태 수습을 요구하며 계엄 당국과 협상을 시도했다. 어떻게 사람을 살리고 더 큰 피해를 막을지에 대해 시민들 안에서도 선택이 갈렸다. 무기를 반납하고 협상해야 한다는 입장과 끝까지 저항해야 한다는 입장이 충돌했다. 하나의 군중 사진에는 함께 버티는 모습이 보이지만, 현장에서는 다음 행동을 정해야 하는 어려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27일 새벽 계엄군은 도청을 비롯한 주요 거점에 진입해 항쟁을 진압했다. 그날을 사건의 마지막으로 쓰면 남은 사람들의 시간이 보이지 않는다. 가족은 죽거나 다친 사람의 행방을 찾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연행과 조사, 낙인과 침묵을 겪었다. 광주의 기록을 보존하고 진상을 밝히려는 활동이 오랫동안 이어진 이유는 끝난 전투를 추억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국가가 가한 폭력과 피해를 공적으로 확인받고 책임을 묻기 위해서였다.

1987년: 조사실의 죽음은 어떻게 전국의 요구가 됐나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학생 박종철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 조사를 받다가 사망했다. 경찰은 수배 중인 선배의 행방을 알아내려 했고 물고문이 이뤄졌다. 경찰이 처음 발표한 사망 경위는 실제 고문을 감추는 설명이었다. 부검과 보도, 관련자들의 증언과 폭로가 그 설명을 무너뜨렸다. 시민들이 맞닥뜨린 문제는 폭력 자체에 더해, 그 폭력을 행사한 기관이 사실을 숨기려 했다는 것이었다.
추모와 진실규명 요구가 이어지는 동안 전두환 정부는 4월 13일 기존 헌법을 유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호헌조치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기존의 간접선거 방식으로 권력을 넘기겠다는 뜻이었다.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 묻는 시민에게, 다음 대통령을 직접 선택할 기회도 열어주지 않겠다는 답이 온 셈이다. 고문 사건에 대한 항의와 선거 제도를 바꾸자는 요구가 연결됐다.
5월에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사건의 축소·은폐를 폭로했다. 6월 9일에는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시위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중태에 빠졌다. 이한열이 쓰러진 장면은 또 다른 학생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현실을 보여줬다. 그는 7월 5일 끝내 사망했다. 6월항쟁은 이미 벌어진 박종철의 죽음에 대한 항의이면서, 눈앞의 부상자를 살려내야 한다는 요구와 함께 진행됐다.
성당의 농성에서 직선제 개헌으로
6월 10일 전국에서 고문 사건 은폐를 규탄하고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명동성당의 농성은 사람들이 계속 모이고 버티는 거점이 됐다. 주변에서 물과 음식, 약품을 전하는 지원이 이어졌고, 회사원들이 점심시간이나 퇴근 뒤 거리로 나오는 모습은 ‘넥타이부대’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대학 안에서 조직한 시위가 대학 밖 사람들의 시간과 장소를 얻으면서 규모와 성격이 달라졌다.
서울만의 일이 아니었다. 부산의 가톨릭센터, 인천의 역과 공단 주변 등에서도 집회와 농성이 이어졌다. 일터에서 나온 사람들은 도시의 집회에 참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후 자기 일터의 임금과 노동시간, 노동조합의 권리도 요구했다. 대통령 선출 방식을 바꾸는 일이 중요한 목표였지만, 그 경험은 누가 일상에서 발언하고 협상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이어졌다.
6월 29일 여당의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등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헌법이 바뀌고 그해 12월 대통령 직선제 선거가 실시됐다. 시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게 된 것은 큰 변화였다. 그러나 곧바로 군사정권과 관계없는 대통령이 선출된 것은 아니다. 노태우가 당선됐다. 제도의 문이 열리는 일과 그 문을 통해 누가 선택되는 일은 별개의 정치 과정이었다. 그래서 1987년은 모든 갈등이 해결된 결말보다, 시민이 권력을 선택하고 다시 책임을 물을 통로가 넓어진 시점으로 읽을 만하다.
2016~2017년: 비선의 국정개입, 촛불, 탄핵심판
2016년 박근혜 정부에서는 공직에 있지 않은 최서원, 당시 최순실로 알려진 인물의 국정개입과 사익 추구 문제가 드러났다. 이후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문건이 전달되고, 그 인물이 의견을 내거나 내용을 수정하고 인사와 재단 운영에 관여한 사실을 심리했다. 문제는 대통령이 사적인 조언을 들었다는 수준에 머물지 않았다. 공식적인 책임과 감독을 받지 않는 사람이 국가의 정보와 권한을 이용할 수 있었는가가 핵심이었다.
촛불집회에서는 대통령의 책임과 퇴진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모였다. 사진에는 가족과 여러 세대의 참가자가 함께 보인다. 1987년의 시위와 같은 방식으로 위험과 참여를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권력의 행사를 공개적으로 설명하고 책임지라는 요구는 이어졌다. 국회는 2016년 12월 9일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의결했다.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됐고 헌법재판소의 심판이 시작됐다.
재판에서 드러난 국정개입에는 돈과 조직이 움직이는 과정도 있었다. 미르와 케이스포츠 재단은 기업들의 출연으로 설립됐지만, 운영의 주요 결정은 출연 기업들이 아니라 대통령과 최서원이 했다. 최서원은 자신이 운영하는 광고회사와 재단 사이에 계약을 맺게 했다.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보좌진이 기업에 특정인 채용이나 거래를 요구한 사례도 심리됐다. 공적인 사업을 지원한다며 모은 자금과 대통령의 영향력이 사적인 이익을 위해 쓰이는 통로가 된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이 과정에서 기업의 재산권과 경영의 자유가 침해됐고, 대통령이 공정하게 공무를 수행할 의무를 어겼다고 판단했다.
사실을 감추는 행위도 파면 판단에서 중요했다. 국정개입 의혹을 부인하고 관련 사실을 숨기면 국회가 조사하거나 언론이 감시할 기회도 줄어든다. 재판부는 위반이 재임 기간에 걸쳐 이어졌고, 대통령의 대응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헌법을 지킬 의지를 찾기 어렵다고 봤다. 단순히 잘못된 정책 하나를 평가한 심판이 아니라 권한의 사적 이용과 감시 차단이 헌법질서에 미친 영향을 판단한 심판이었다.
모든 소추사유가 그대로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공무원 인사와 언론사에 대한 압력에 관한 일부 주장은 대통령의 관여나 사익과의 연결을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됐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서도 법정의견은 대통령의 성실한 직책 수행이라는 추상적 의무만으로 파면을 판단하기 어렵다고 봤다. 두 재판관은 보충의견에서 불성실한 수행을 지적했지만 그것만으로 파면 사유를 구성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참사에 대한 책임을 둘러싼 사회적 비판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이 재판이 어떤 법적 기준으로 대통령직을 끝낼 수 있는지를 따져 나온 결론이었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대통령을 파면했다. 시민들의 집회가 법적 판단을 대신한 것은 아니지만, 책임을 묻는 요구가 공적인 절차를 거쳐 대통령직을 끝내는 결과에 이르렀다. 다음 대통령을 뽑는 선거와 관련 형사재판은 다시 각각의 절차로 이어졌다. 이 경험 뒤에도 대통령의 권력이 스스로 한계를 지킬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2024년 12월의 계엄은 이미 마련된 통제 장치가 또 한 번 실제로 작동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2024년 12월 3일: 대통령의 담화가 일상의 규칙을 바꾸려던 밤
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은 대국민담화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헌법재판소의 사건 기록은 선포 시점을 오후 10시 27분경으로 적는다. 대통령은 야당의 탄핵 추진과 예산 삭감 등을 국정 마비의 이유로 제시했다. 이것은 당시 대통령이 밝힌 선포 이유다. 그 사유가 헌법이 요구하는 비상사태에 해당했는지는 이후 법원이 별도로 판단했다. 선포한 사람이 위기라고 주장했다는 사실과 법적으로 계엄을 발동할 조건이 있었다는 판단은 같은 말이 아니다.
계엄은 대통령이 정치적 갈등을 빨리 해결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일상적인 수단이 아니다. 헌법 제77조는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라는 조건을 둔다. 병력으로 군사상의 필요에 대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 한해 작동하는 예외적인 권한이다. 평상시에는 시민이 정당에 참여하고 집회에 나가거나 정부를 비판하는 일이 군의 명령으로 허용 여부가 정해지지 않는다. 계엄 선포가 충격을 준 이유는 바로 그 평상시의 질서에 군사적 권력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육군참모총장 박안수는 포고령 제1호를 발령했다. 포고령은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을 비롯한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언론·출판을 계엄사령부의 통제 아래 두겠다고 했다. 헌법이 계엄을 견제하도록 정해 놓은 국회까지 정치활동 금지 대상에 넣은 것이다. ‘비상계엄’이라는 큰 이름만 읽으면 이 충돌이 보이지 않는다. 포고령이 금지하려던 활동을 하나씩 읽으면, 계엄을 해제하라고 요구해야 할 기관의 활동마저 계엄 명령으로 막으려 했다는 문제를 확인할 수 있다.
포고령에는 적용 시각이 12월 3일 오후 11시로 쓰여 있지만, 헌법재판소 결정문이 기록한 실제 발령 시각은 오후 11시 23분경이다. 선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통제 절차가 작동하지 않았다. 재판소는 국무위원들이 모였다는 사실만으로 실질적인 국무회의 심의가 있었다고 보지 않았다. 선포문에는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의 부서가 없었고, 선포 뒤 국회에 공식적으로 통고하는 절차도 지켜지지 않았다. 장관들의 검토와 책임 확인, 국회의 해제 요구를 가능하게 할 통고가 하나씩 빠졌다. 비상 권한의 크기만 커진 것이 아니라 그 권한을 점검하도록 둔 절차들이 생략된 밤이었다.
국회 안팎: 해제 표결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지키는 일
계엄 선포 뒤 정치의 중심은 국회로 옮겨 갔다. 국회는 대통령의 계엄을 끝내도록 요구할 수 있는 헌법상 기관이었다. 헌법 제77조 제5항은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 해제를 요구하면 대통령이 해제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대통령에게 넓은 긴급 권한을 주면서도 국회가 그것을 멈출 수 있게 만든 장치다. 그런데 그 장치가 작동하려면 의원들이 국회에 들어가 의사를 결정할 수 있어야 했다.
헌법재판소가 인정한 사실에는 병력의 이동과 대통령의 전화 지시가 구체적으로 나온다. 제707특수임무단 병력 97명이 헬기를 타고 국회로 출동했고, 이들 중 16명은 12월 4일 오전 0시 33분경 본관 오른쪽 유리창 두 개를 깨뜨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제1공수여단 병력도 경내에 진입했다. 국회 직원과 의원 보좌관들은 집기를 쌓아 길을 막고 소화기를 분사하거나 몸으로 병력의 이동을 저지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이 다쳤고 건물과 시설이 손상됐다.
재판소는 대통령이 오전 0시 30분경 특수전사령관에게 전화해 의결정족수가 아직 채워지지 않은 것 같다며, 문을 부수고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내라는 지시를 한 사실도 인정했다. 윤석열은 그런 지시를 부인했지만, 재판소는 당시 본회의장에 의원들이 모이고 있었던 상황과 지휘관들의 진술, 부대 회의의 열린 마이크로 전달된 발언 등을 검토해 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회의 활동을 포고령으로 금지한 데 이어, 표결할 사람의 수를 물리적으로 줄이려 했다는 판단이었다.
병력은 본회의장까지 들어가지 못했다. 의원들이 회의장에 모이는 동안 복도와 출입구를 막던 사람들의 행동이 시간을 벌었다. 해제 요구안의 가결을 확인한 뒤 특수전사령관이 임무 중지와 철수를 지시했다. 국회가 계엄을 통제한다는 헌법 문구는 이처럼 의원이 회의장에 도달하고 표결을 끝낼 수 있는 공간을 지키는 일과 맞물렸다.
12월 4일 오전 1시 2분경, 국회 본회의는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가결했다. 재석 의원 190명이 모두 찬성했다. 이 표결은 ‘계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견 표시가 아니라 대통령에게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헌법상 권한의 행사였다. 의결이 이뤄지자 대통령에게는 해제 의무가 발생했다.
대통령의 해제 발표는 표결 직후에 나오지 않았다. 같은 날 오전 4시 20분경 해제 담화를 발표했고, 오전 4시 29분경 국무회의에서 해제안이 의결됐다. 의원들이 요구안을 통과시킨 뒤에도 약 세 시간이 흘렀다. 밤중에 내려진 포고령과 병력의 이동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군의 철수와 정부의 해제 발표를 계속 확인해야 했다. 이 글의 시각은 헌법재판소 결정문을 기준으로 적었다.


계엄 해제 다음의 질문: 책임도 끝났는가
계엄은 해제됐지만 계엄을 선포하고 병력을 투입한 행위의 책임까지 없어지지는 않았다. 대통령이 그 권한을 계속 행사해도 되는지 묻는 탄핵 절차와, 구체적인 행위가 형사범죄에 해당하는지 수사하는 절차가 이어졌다. 두 절차는 같은 사건에서 출발했지만 목적과 판단 기준이 다르다. 탄핵심판은 대통령의 직무상 헌법·법률 위반이 파면할 만큼 중대한지 판단한다. 형사재판은 개별 범죄의 요건과 증거를 따져 형벌을 결정한다.
첫 탄핵소추안은 12월 7일 국회 표결에서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했다. 대통령 탄핵소추에는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당시 300석을 기준으로 200명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다. 여당 의원들의 다수가 표결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첫 투표는 성립하지 않았다. 계엄이 해제됐다는 사실만으로 국회의 책임 판단이 자동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시민의 요구가 커졌다는 이유만으로 탄핵 의결 요건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12월 14일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재적의원 300명 가운데 204명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탄핵소추 의결 뒤 대통령의 권한 행사는 정지됐다. 그러나 이 단계는 최종 파면이 아니다. 국회가 의결하고 헌법재판소가 그 사유를 심리하는 구조이므로, ‘소추 가결’과 ‘파면 결정’ 사이에는 별도의 심판이 있다. 국회 앞의 대규모 집회와 응원봉의 불빛은 이 과정의 사회적 장면이었고, 의결과 심판은 각 기관이 자신의 권한으로 처리해야 할 제도적 과정이었다.
한남동의 대치: 영장은 나왔는데 왜 집행되지 않았을까
계엄 사건 수사에서는 대통령을 조사하기 위한 신병 확보가 쟁점이 됐다. 2025년 1월 3일 공수처와 경찰이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체포영장 집행을 시도했지만, 경호처 측의 저지와 대치 끝에 집행을 중단했다. 법원이 영장을 발부했다는 사실과 그 영장을 현장에서 실행할 수 있다는 사실 사이에 큰 간격이 드러난 날이었다.
여기서 대통령 경호와 수사의 관계를 짚어야 한다. 경호는 대통령의 안전을 보호하는 업무다. 그렇다고 법원이 발부한 영장의 효력을 경호 조직이 자신의 판단으로 없앨 수 있는지는 별도의 법적 문제다. 윤석열 측은 공수처의 수사 권한과 영장의 적법성에 이의를 제기했다. 반면 수사기관은 법원이 발부한 영장을 집행하려 했다. 현장에서는 기관 간 법률 해석의 다툼이 관저 출입, 인력의 배치와 이동을 둘러싼 물리적인 대치로 나타났다.
영장 집행을 막는 방식은 말로 이의를 제기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이후 형사재판 자료에는 경호처 인력과 자원을 동원한 차벽 설치와 인간 스크럼, 수사관들에게 가한 유형력이 등장한다. 첫 집행이 실패한 뒤에는 새 영장의 집행을 막기 위한 철조망과 차벽 설치, 스크럼 훈련, 위력 순찰도 이어졌다. 관저의 안전을 보호하는 업무가 수사기관의 진입을 막는 업무로 바뀌었는지가 재판의 쟁점이 됐다. 대법원은 영장 집행을 방해할 목적으로 이런 일을 하게 한 것을 정당한 경호행위로 볼 수 없다는 원심 판단을 받아들였다.
공수처에 수사 권한이 없으므로 영장 집행도 부당하다는 주장은 어떻게 판단됐을까. 대법원은 대통령의 불소추특권이 재직 중 모든 수사까지 금지하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이 사건에서는 공수처가 자신의 수사 대상인 직권남용 사건을 실질적으로 수사하면서 직접 관련된 내란 혐의를 인지했다는 점도 판단했다. 따라서 내란 혐의에 대한 수사 역시 공수처법이 정한 관련범죄 수사의 범위에 들어간다고 봤다. 이것은 수사기관이 어떤 범죄든 마음대로 수사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이 사건에서 실제 수사한 범죄와 그 관련성을 따진 결론이다.
관저가 군사상 비밀을 요하는 장소라는 이유로 수색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문제도 심리됐다. 대법원은 그 장소의 책임자에게 무제한의 거부권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해할 우려가 있는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사유가 필요하다고 봤다. 이 사건에서는 경호처장이 그런 사유를 제시하지 않았고 중대한 국가 이익의 침해 우려도 인정되지 않아, 거부가 부적법하고 수색영장 집행은 적법하다는 판단을 유지했다.
체포방해 등 사건은 1심 징역 5년, 항소심 징역 7년을 거쳐 2026년 7월 9일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대법원은 피고인과 특별검사의 상고를 모두 기각했다. 다만 기소된 모든 행위를 일괄해서 유죄로 처리한 것은 아니다. 허위 비상계엄 선포문을 작성한 행위와 그 문서를 행사했다는 혐의에서도 판단이 갈렸다. 서랍에 보관한 것만으로 문서를 행사했다고 볼 수 없다는 무죄 판단이 유지됐다. 이런 개별 판단을 읽으면 ‘체포방해 유죄’라는 큰 제목 뒤에서 법원이 무엇을 인정했고 무엇을 인정하지 않았는지도 알 수 있다.

눈 속의 키세스단: 집회는 무대 밖에서 어떻게 이어졌나
첫 체포영장 집행이 실패한 뒤 탄핵을 요구하던 시민들의 집회는 한남동 관저 앞으로 이어졌다. 1월 4일 밤부터 5일 새벽에는 눈과 추위 속에서 시민들이 은박 보온담요를 두르고 자리를 지켰다. 몸을 둥글게 감싼 은빛 담요의 모습이 포일에 싸인 초콜릿을 닮았다고 해서 ‘키세스 시위대’, ‘키세스단’이라는 별칭이 퍼졌다. 하나의 정식 단체 이름이라기보다, 그 현장의 모습을 부르는 이름으로 읽는 편이 정확하다.
이 장면은 불빛과 노래로만 집회를 설명할 때 빠지는 일을 보여 준다. 몇 시간 또는 밤새 한자리를 지키는 일에는 체온을 유지할 담요, 먹을 것, 쉴 공간이 필요하다. 당시 보도에는 인근의 휴식 공간과 시민들이 보낸 식사 지원도 등장했다. 현장에 직접 앉아 있는 사람들만으로 집회가 유지된 것이 아니라, 물품과 공간을 제공하는 사람들의 참여도 함께 작동한 셈이다. K문화의 공연장에서 쓰이던 응원봉이 집회의 시각적 상징이었다면 보온담요는 그 자리에 계속 머물기 위한 생활의 도구였다.
눈은 집회의 무대 배경이 아니라 참가자들이 버텨야 할 환경이었다. 영장이 집행되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면 수사도 지연될 수 있었다. 시민들이 관저 앞에 머무른 것은 그 집행을 계속 요구하고 지켜보려는 행동이었다. 담요를 두르는 사람, 따뜻한 식사를 보내는 사람, 쉴 공간을 여는 사람의 행동이 이어지면서 거리의 요구가 다음 날까지 유지됐다. 은빛 담요라는 상징에는 그렇게 밤을 넘긴 사람들의 노동과 돌봄도 들어 있다.
1월 15일 체포: 탄핵심판과 수사가 나란히 진행되다
2025년 1월 15일 오전 10시 33분, 공수처와 경찰의 두 번째 체포영장 집행으로 윤석열 대통령이 체포됐다. 첫 시도에서 집행이 멈춘 뒤 열두 날이 지난 시점이다. 관저의 출입을 둘러싼 대치가 끝나고 수사기관이 신병을 확보했다는 뜻이지, 체포 순간에 모든 혐의가 유죄로 확정됐다는 뜻은 아니다.
체포와 구속도 같지 않다. 체포는 조사를 위해 일정 시간 신병을 확보하는 절차이며, 그 뒤 계속 구금하려면 구속의 필요성과 요건을 다시 심사받아야 한다. 이후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다음 사건을 이해하려면 이 순서를 기억해야 한다. 1월 15일의 체포, 18일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 19일 새벽 알려진 구속영장 발부는 서로 다른 단계다.
같은 시기 헌법재판소에서는 대통령 탄핵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묻는 심판과 범죄 혐의를 수사하는 절차가 동시에 진행된 것이다. 탄핵심판 자료가 형사사건과 관련될 수는 있어도 파면이 곧 형사 유죄판결인 것은 아니다. 반대로 체포됐다는 이유만으로 헌법재판소의 심판이 생략되는 것도 아니다. 절차를 구분하면 당시 뉴스에 반복해서 등장하던 ‘탄핵’, ‘체포’, ‘구속’, ‘재판’이 각각 어떤 일을 가리키는지 보인다.
1월 19일 법원 습격: 판결에 반대하는 것과 법정을 파괴하는 것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영장 발부 소식이 알려진 2025년 1월 19일 새벽, 지지자 일부가 서울서부지방법원에 침입하고 시설을 파손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대통령 관저의 영장 집행 대치와도, 탄핵을 촉구하던 집회와도 구분해 기술해야 한다. 장소는 법원이었고, 직접적인 계기는 구속영장 발부였다. 법원의 판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람들이 법원 건물과 그곳의 업무를 공격한 사건이다.
법원 판단은 비판할 수 있다. 당사자는 법이 정한 절차로 다툴 수 있고, 시민도 판결의 근거와 제도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다. 그러나 시설을 부수거나 업무 공간에 침입해 사람을 위협하는 행위는 의견의 크기나 절박함만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헌법상 집회·표현의 자유와 개별 폭력 행위에 대한 형사책임을 따로 봐야 하는 이유다. 집회에 참석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사람이 습격에 가담했다고 쓰는 것도 잘못이다. 책임은 실제 행위와 증거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법원 앞의 대치는 구속영장 발부 전에 시작됐다. 1월 18일 오후 윤석열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이 진행되는 동안 지지자들이 법원 주변에 모였다. 저녁에는 일부가 후문을 넘으려 했고, 심문을 마치고 돌아가던 공수처 직원들의 차량을 막는 일도 벌어졌다. 이후 대법원이 확정한 사건 기록에는 차량 앞에서 유리창을 두드리고 뒤에서는 사람들이 스크럼을 만들어 후진을 막은 행위가 나온다. 차에 탄 직원들은 법원에서 일을 마치고도 현장을 떠날 수 없었다. 새벽의 건물 난입만 보면 그 전에 사람의 이동과 업무를 막던 과정이 빠진다.
당시 법원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다음 날 국회에 보고된 기록으로 더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1월 20일 법사위에서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은 오전 2시 53분경 공수처가 영장 실물과 기록을 받고, 2시 59분경 법원이 발부 사실을 공지한 뒤 3시 무렵 언론 보도가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그의 보고에서 일부 지지자가 경찰 저지선을 뚫고 경내로 들어온 때는 3시 7분경, 정문과 유리창을 부수며 내부로 들어온 때는 3시 21분경이다. 이 시각은 다음 날의 초기 보고이며, 이후 백서와 개별 판결이 제시하는 세부 시각·장소와 구분해 읽어야 한다. 발부 소식, 경내 진입, 건물 내부 침입은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당직실은 야간 영장 업무를 처리하는 공간이지만, 그날에는 진입을 막고 몸을 숨기는 공간이 됐다. 배형원 법원행정처차장은 직원들이 자판기를 옮겨 입구를 막았으나 당직실 유리창이 깨지고 사람들이 들어와 위층으로 대피했다고 보고했다. 그는 당직실의 CCTV 장비가 손상돼 복원 절차를 진행 중이라고도 설명했다. 나중에 정리된 백서는 직원2명과 부상 경찰1명이 숙직실로 피신한 상황을 기록한다. 출입문을 지키는 일과 안에 있는 사람을 보호하는 일이 동시에 벌어진 것이다. 물건을 파손했다는 짧은 표현만으로는, 업무 장비의 손상과 사람들의 피신이 같은 위험 속에서 이어졌다는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대피도 옥상으로 올라가는 한 번의 이동으로 끝나지 않았다. 국회 회의록5쪽에 실린 당시 경과보고에는 직원들이 옥상 출입문에 의자 등을 대고 추가 침입에 대비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후 다시 들어오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 때문에 지하2층 설비실로 이동해 청사 밖 상황이 안정되기를 기다렸다. 옥상과 지하는 관광객에게는 건물의 위치일 뿐이지만, 당시 직원에게는 몸을 지키고 다음 이동을 판단해야 하는 장소였다. 이 대피 기록은 법원 전체가 비어 있었거나, 위험이 건물 밖에만 있었다는 식으로 사건을 읽을 수 없게 한다.
일부 침입자는 법관 집무실이 있는7층까지 올라갔다. 천대엽의 보고는 영장 판사를 찾던 사람들과 해당 집무실의 파손을 설명했고, 이후 확정된 사건의 판결에는 문을 발로 차 잠금장치를 손상시키고 사무실을 수색한 실제 행위가 나온다. 당시 보고자의 추측을 전체 가담자의 사전 계획이 입증된 사실처럼 바꾸어서는 안 된다. 경찰은 초기 국회 보고상3시32분경 내부 진압과 체포를 시작했고,5시15분경에는 청사 내부 침입자를 퇴거시켰다. 청사 밖 대치는 계속돼7시28분경 대부분 해산한 것으로 보고됐다. 내부를 확보한 시점과 주변 상황이 진정된 시점도 달랐다.
다음 날 재판과 민원업무를 다시 시작한 것은 모든 피해가 복구됐다는 선언이 아니었다. 천대엽은1월20일 국회에서 인력과 시설을 지원해 당일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오후 질의에서는 직원들이 정신적 충격을 호소하고 있어 지속적인 돌봄을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회의 질의는 빠른 재개와 직원의 회복이 함께 가능한지도 물었다. 창문과 출입문, 컴퓨터와 감시·출입통제 장비를 다시 갖추는 일, 민원인이 업무를 보는 일, 현장에서 위협을 겪은 사람이 안정을 찾는 일은 같은 속도로 진행되지 않는다. 법원이 문을 열었다는 사실과 사건이 끝났다는 판단 사이에는 이 간격이 남는다.
형사재판도 실제 행위에 따라 갈렸다. 2026년 4월 30일 대법원은 사건번호 2026도999에서 침입·공무집행 방해·차량 안 직원 감금·시설 손상 등에 관한 원심 판단을 확정했다. 이 재판에 포함된 피고인들에게는 실형과 집행유예, 벌금이 각각 선고됐다. 판결은 한 집회에 있었다는 사실을 하나의 처벌로 묶지 않고, 어디까지 들어갔는지와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따졌다. 여러 사람이 함께 행사한 위력을 이용한 침입과 개별 건조물침입도 구분했다. 이 사건의 확정은 법원 습격과 관련한 모든 재판이 일괄 종료됐다는 뜻은 아니다.
시설을 다시 갖추는 비용에 대해서는 민사 절차가 뒤따랐다. 대법원이 공개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법원은 2026년 8월 26일 유죄판결이 확정된 가담자 5명을 상대로 복구비 약 11억 7,590만 원과 지연손해금을 청구했다. 이는 소송에서 요구한 금액이며 이미 지급받았거나 배상판결로 확정된 금액이 아니다. 백서의 초기 피해 추산과 이후 복구비 청구액은 산정 대상과 시점이 다르다. 사건은 침입자를 밖으로 밀어냈을 때 끝난 것이 아니라, 훼손된 공공시설을 회복하고 누가 그 비용을 부담할지 따지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국회를 향한 계엄군의 진입과 법원 습격은 행위 주체와 법적 사건이 다르다. 그럼에도 두 장면이 같은 민주주의의 질문을 남긴다는 것이 이 글의 판단이다. 자신에게 불리한 결정을 내리는 기관을 물리적으로 막아도 되는가. 국회가 해제 요구를 의결하고 법원이 영장을 심사하는 권한은 그 결론에 동의하는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법원 습격의 문제는 유리창 몇 장의 가격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람을 위협하지 않고도 결정을 다툴 수 있어야 할 공간 자체가 공격받았다는 데 있다.
4월 4일 파면, 그리고 끝나지 않은 형사재판
2025년 4월 4일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했다. 결정문에는 선고 시각이 오전 11시 22분으로 적혀 있다. 재판소는 계엄 선포와 그에 따른 행위를 헌법과 법률에 비춰 심사했다. 대통령이 계엄을 고도의 통치행위라고 주장하더라도 사법적 심사를 피할 수 없다는 판단이 포함됐다. 긴급 권한일수록 발동 요건과 통제가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원리가 작동한 것이다.
윤석열은 계엄이 야당의 행태를 국민에게 알리는 경고였고 곧 해제됐으므로 위반이 중대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재판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포고령이 정치활동과 기본권을 제한하고, 병력이 국회의 권한 행사를 방해한 순간 이미 헌법질서가 침해됐다고 판단했다. 국회가 해제 요구안을 통과시킨 것도 대통령이 국회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서가 아니라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해제 요구를 따랐다는 사실이 그 전에 한 위반을 지우지는 않는다는 결론이었다.
계엄군은 국회 외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도 투입됐다. 재판소는 부정선거 의혹을 해소한다는 이유로 선관위 청사를 점거하고 전산시스템 등을 압수·수색하게 한 행위가 선관위의 독립성을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국회의 표결을 막으려 한 행위, 선거관리 기관에 대한 군의 개입, 정치적 표현을 금지한 포고령은 서로 다른 기관과 권리에 영향을 미쳤다. 이를 종합해 재판소는 대통령의 권한을 유지할 때의 위험보다 파면을 통해 헌법을 지킬 이익이 크다고 판단했다.
파면 뒤에는 대통령 궐위에 따른 선거와 정권 이양이 이어졌다. 계엄 사건의 수사와 재판은 계속됐다. 2026년 2월 19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5부는 내란우두머리와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사건의 1심에서 윤석열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같은 재판에서도 피고인들의 역할과 증거에 따라 유죄와 무죄, 형량이 각각 달랐다.
1심 재판부는 대통령이 헌법을 지킬 책무를 지면서도 비상사태가 아닌 상황에서 계엄을 선포하고 군경을 통해 국회를 봉쇄하려 한 행위를 무겁게 판단했다. 정치적 중립성이 훼손된 군과 경찰, 적법한 명령인지 의심해야 하는 하급자들, 다시 치른 대통령 선거와 대규모 수사·재판 등 사회적 비용도 양형 이유에 포함됐다. 반면 계엄이 비교적 짧았고 현장에서 물리력 사용이 자제돼 치명적인 부상자가 없었으며 여러 계획이 실제 실행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사정도 고려했다. 판결은 이 사정들을 살폈지만 목표가 달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임을 없애지는 않았다.
이 본안은 2026년 10월에도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1심 무기징역을 확정형으로 쓰면 다음 재판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지우게 된다. 체포방해 등 별도 사건의 징역 7년은 2026년 7월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같은 사람의 같은 계엄에서 비롯된 사건이라도 기소된 행위와 재판 단계는 다르다. 대통령직의 종료 뒤에도 각 법원이 구체적인 책임을 계속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투표할 방과 영장을 집행할 문
1960년에는 투표용지가 있어도 다른 사람 앞에서 누구를 찍었는지 확인받아야 했다. 1987년에는 대통령을 직접 선택할 수 없었고, 경찰의 조사실에서 일어난 일을 시민들이 다시 밝혀야 했다. 2024년에는 대통령을 직접 뽑는 제도와 계엄을 해제할 국회의 권한이 있었지만, 의원들이 표결할 방에 도달하기까지 병력의 진입을 막아야 했다. 시대마다 권리를 가로막은 방식은 달랐고 그것을 되찾는 일도 달랐다.
관저에서는 영장을 집행할 문이 막혔고 법원에서는 그 영장을 심사한 업무 공간이 공격받았다. 한남동 거리의 참가자들이 밤을 넘길 때에는 보온담요와 식사, 쉴 곳을 마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법원이 다시 업무를 시작할 때에는 피신했던 직원들이 돌아와 부서진 장비를 대신하며 일을 이어갔다. 뉴스의 큰 결론 아래에는 그렇게 실제로 결정을 내리고 실행할 수 있는 장소와 사람을 지키는 일이 있었다.
한국 민주주의에서 인상적인 성취는 이 과정이 대통령의 파면과 법원의 판단으로 이어졌다는 데 있다. 동시에 4월혁명 뒤의 쿠데타와 민주화 이후의 계엄은, 시민이 얻은 권한도 다시 빼앗길 수 있다는 사실을 남긴다. 결정에 반대하는 사람이 그 결정을 법으로 다툴 수 있고, 결정이 불리하다고 다른 사람의 투표와 수사와 재판을 힘으로 막을 수는 없는 사회. 그 조건을 유지하는 일이 다음 집회와 선거 사이에도 계속돼야 한다는 것이 이 역사에서 남는 생각이다.
시민의 참여와 제도의 절차는 서로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성취를 기억하는 만큼 단절과 희생, 권력의 한계를 함께 읽을 때 더 선명해집니다.
자료와 읽는 기준
한국민주화운동사:1960 ↗4월혁명기 민주화운동 ↗한국민주화운동사:1980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대한민국헌법 제65조 ↗1987-10-29대한민국헌법 제77조 ↗1987-10-292016헌나1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요지 ↗2017-03-102024년 하반기 헌법재판소 뉴스레터 ↗2024헌나8 대통령(윤석열) 탄핵 선고요지 ↗2025-04-0411호 ‘촛불’,‘태극기’,그리고 5070세대공감 ↗20172024헌나8 대통령(윤석열) 탄핵 사건 — 분야별 주요판례 ↗2025-04-043·15 부정선거 지시와 시행 ↗4·25 대학교수단 시위 ↗5·18 민주화운동의 전개 ↗6·10 민주항쟁 ↗박종철과6월 민주항쟁 기록 ↗2024헌나8 결정문과 주요 판단 ↗2025-04-042026도6500 체포방해 등 확정판결 보도자료 ↗2026-07-09눈 속에서 밤을 지킨 키세스 시위대 ↗2025-01-05윤석열 체포영장 두 번째 집행 ↗2025-01-15서울서부지방법원1·19폭동사건백서 ↗2025-12-232026도999 법원 침입 등 확정판결 ↗2026-04-30서부지방법원 폭동 복구비 민사소송 제기 ↗2026-08-272025고합129 내란우두머리 등1심 판결 ↗2026-02-19내란우두머리 항소심 진행 보도 ↗2026-10-062025년1월20일 법사위 긴급현안질의 회의록 ↗2025-01-202026도999 실제 대법원 판결문 ↗2026-04-302025노2439 항소심 판결문 ↗2025-12-292016년 11월 26일 광화문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요구 집회. 사진 Jj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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